스카치 위스키의 역사

위스키의 이름과 관련한 스카치 위스키와 아이리쉬 위스키의 원조논쟁에 관련한 포스팅에서 자신들이 위스키의 근본이라는 자긍심을 표현하기 위해 위스키의 철자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 19세기까지만해도 아일랜드가 위스키의 심장으로 여겨졌었지만, 블랜디드 위스키가 위스키로 인정받게되면서 지금은 세계 위스키의 절반 이상을 100여개의 스코틀랜드 증류소에서 생산하고 있고, 아일랜드의 위스키 증류소는 10개도 남지 않았을만큼 두 나라의 위스키에 대한 판도는 뒤바뀌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주(갈색 빛의 증류주)’의 종류 중 90% 이상이 스카치 위스키입니다. 위스키 작가 데이브 브룸(Dave Broom)은 ‘스카치는 세계가 위스키를 부르는 이름이다(Scotch is now world says whisky)’라고 말했을 정도로 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위스키=스카치’가 된 것일까요?

스코틀랜드 역사로 알아보는 스카치 위스키

스카치 위스키를 설명하려면, 당연히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스케 바하는 게일어로, 이는 켈트족의 언어입니다. 켈트족은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던 토착민족이죠. 스코틀랜드는 ‘맬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내용처럼 독립전쟁 이후, 300여 년간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로 건너가 최초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제임스 1세가 되고, 그 후손인 앤 여왕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설립으로 두 나라를 공식적으로 하나의 왕국으로 선포했습니다. 총 100여 년의 기간을 거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나라로 합쳐진 것입니다.

스카치 위스키의 역사 도표
한눈에 정리한 스카치 위스키 역사(참고)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의 사람들은 잉글랜드 위주로 합병되는 것에 반발을 나타냅니다. 스코틀랜드는 크게 로우랜드(Lowland)하이랜드(Highland)로 나눠지며, 특히 하이랜드 지역의 사람들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로우랜드는 잉글랜드와 접해 있는 곳이었기에 잉글랜드의 산업화를 함께하면서 빠른 부를 축적했으므로 잉글랜드와 합병되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잉글랜드와 떨어져 있던 하이랜드 지역 사람들은 산업화 자체가 켈트족의 문화를 잃는 것이라 생각해 산업화와 합병을 거부했죠. 그래서 하이랜드 사람들은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상대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지역에 따른 잉글랜드 합병 찬반에 대한 그림

잉글랜드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하이랜드 지역을 설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굴복)할 수단이 필요했죠. 그 수단으로 경제적인 압박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하이랜드 지역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위스키’를 못 만들게 합니다. 하이랜드 지역은 집에서 농사한 작물을 이용해 위스키를 만들어 파는 것이 가계 수입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위스키의 원재료인 맥아(싹을 틔운 보리)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소형 증류기를 불법으로 지정해 집마다 위스키를 만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이랜드 사람들은 오히려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는데요. ‘법을 어기고 위스키를 지키는 것이 켈트족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저항정신이 생겨난 거죠. 세금을 부여하고, 감시하는 세관원을 피하려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밀주(불법으로 유통되는 술)업자로 전향하게 됩니다. 위스키를 만드는 것도 세관원이 없는 밤에 몰래 만들기 시작하고요. 그래서 이때의 밀주를 달빛 아래에서 만들었다는 의미로 ‘문샤인(Moon Shine)’이라고 부릅니다.

문샤인 증류기와 현대식 증류기의 사진
문샤인 증류기(왼쪽)과 일반 위스키 증류기(오른쪽)

저항과정에서 만들어진 위스키 문화1: 피트 위스키

이러한 저항의 시대에 위스키 제작 기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 시대에 탄생한 ‘피트(peat) 위스키’입니다. 세금 때문에 위스키를 만드는 데 큰 비용이 발생하자, 원가를 낮출 방법이 필요해졌고, 재료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위스키를 건조하거나 증류할 때 사용하는 연료인 석탄을 값이 싼 ‘피트’라는 연료로 변경한 것이죠. 이 피트는 우리나라 말로 ‘토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진흙 형태의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 효율이 떨어지는 값싼 연료입니다. 이 연료를 태우면 특유한 냄새가 맥아에 배어들게 되는데요. 이 특유의 향이 피트위스키라는 위스키의 종류를 탄생시킵니다. 병원 소독약 냄새 같은 향이 나는 피트위스키는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피트와 피트위스키의 사진
피트(왼쪽)과 피트 위스키(오른쪽)

저항과정에서 만들어진 위스키 문화2: 캐스크 숙성

또 다른 발전은 숙성 기술이 탄생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위스키를 세관원을 피해 몰래 팔아야 하기 때문에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세관원의 눈을 속여 저장할 방법을 찾게 되는데요. 그 방법은 와인을 저장하는 것처럼 오크통(참나무통)에 위스키를 넣고 창고에 보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위스키에 오크의 풍미가 들어가면서 맛이 더 풍부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지금의 위스키 숙성 기술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위스키가 투명한 색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갈색 혹은 황금색을 머금게 됩니다.

숙성고에서의 오크통 저장모습과 셰리위스키의 사진
위스키를 오크통에 숙성하는 모습(왼쪽)과 와인캐스크 중 셰리와인 캐스크에 숙성하는 대표 위스키(오른쪽)

저항의 결과

이렇게 강인한 정신으로 지켜진 위스키는 결국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1860년대 필록세라*의 창궐로 유럽의 포도나무들이 거의 다 멸종하게 되면서 당시 거의 유일한 독주였던 브랜디(와인을 증류한 술)가 생산에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덕분에 위스키에 대한 니즈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영국이 만들어지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맛본 미군들이 본국에서도 위스키를 찾게 되는 등 위스키가 세계시장으로 널리 뻗어 나가는 기회들을 얻게 됩니다.

저항 결과를 보여주는 그림

즉, 현재 스카치 위스키가 보존되고 인기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뿌리를 잃지 않으려 저항했던 스코틀랜드의 저항정신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들의 뿌리를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세계적인 위스키 강국이 되지는 않았겠죠? 이에 대한 포스팅은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포스팅을 참고해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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