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위스키 트랜드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기타 위스키의 시장 증가 중 가장 큰 축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재패니즈 위스키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술
일본은 위스키 세계 5대 국가로 인정받는 위스키 강국입니다. 2023년에는 위스키 역사가 무려 100년이 되는 해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어떻게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위스키 사업을 유지해 올 수 있었으며, 세계적인 위스키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일본을 대표하는 술을 묻는다면 당연히 많은 사람이 사케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가장 많이 수출하고 있는 술도 사케일까요? <일본 위스키, 100년의 여행>이라는 책 내용에 따르면, 2023년 위스키 수출액은 약 560억 엔, 사케는 470억 엔을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의외로 사케를 제치고 위스키가 일본 주류 수출액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일본 내에서 농림축산식품 분야까지 모두 포함해 위스키가 수출량 2위를 기록했다는 겁니다. (1위는 가리비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에선지 일본 정부관광국 공식 사이트에서는 일본의 위스키를 자신들의 전통이자 강점으로 광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증류주 판매량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브랜드는 우리나라의 진로입니다. 그런데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주류 총수출액을 살펴보면 약 3979억 원입니다. 일본은 위스키라는 하나의 주종만으로 약 5000억 원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저조한 수출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 증류주 순위에 일본 위스키가 랭크되지 않았음에도, 일본 위스키가 증류주 세계 1위인 진로의 판매액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요. 바로 그 이유는 일본 위스키 가격이 나날이 고공행진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당장 어딘가에 1000만 원을 투자하는 대신, 15년 후에 투자 금액의 40배가 넘는 금액으로 돌려받을 것이 보장된다면, 투자하실 의향이 있으실까요? 저는 굉장히 매력적인 투자처라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바로 세계적인 재패니즈 위스키 인기의 현주소라는 겁니다. 일본의 위스키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산토리 社는 야마자키 50년이라는 위스키를 2005년에 1st, 2007년에 2nd, 2012년에 3rd 에디션으로 출시했는데, 이 중 1st 에디션은 한 병당 1000만 원이라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된 지 하루 만에 완판이 돼 뉴스 화젯거리로 실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위스키는 2018년 홍콩 본햄(bonham) 경매에서 4억 4000만 원, 2019년에 타이베이 경매에서 5억 5000만 원으로 낙찰됐다고 하네요. 지금은 더 비싸게 팔리겠죠?
그렇다면 2020년 2월, 100병 한정판으로 3000만 원에 출시됐던 야마자키 증류소의 최고(古) 숙성 위스키인 야마자키 55년은 어떨까요? 이 위스키는 출시 당시 구매하려는 사람이 몰렸다는 이유로, 일본 거주자만 추첨을 통해 살 수 있는 권한을 줬다고 합니다. 그 후로부터 6개월 후인 8월, 100병 중 1병이 홍콩 경매에 나왔고, 무려 10억이라는 가격에 낙찰됐다고 하네요. 3000만 원이 6개월 후에 10억이 됐으니, 웬만한 투자 성공도 이런 성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패니즈 위스키의 역사와 정신
재패니즈 위스키의 시작을 알린 두 인물
일본 위스키 역사는 토리이 신지로와 타케츠루 마사타카라는 인물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약재 도매상에서 견습 직원으로 일하며 술을 공부한 토리이 신지로는 1899년 코토부키야라는 회사를 창립하며 와인 제조에 몰두합니다. 이때, 스페인의 주정 강화 와인인 포트와인을 일본식으로 재해석해 발매한 아카다마 포트와인이 대박 나면서 당시 일본에 없던 진짜 위스키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 당시 일본에는 동시대 우리나라 위스키 산업에서 해 오던 것처럼 위스키에 향과 색을 넣어 만든 유사 위스키들만 즐비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위스키를 만들고자 토리이가 삼고초려를 해 영입한 인물이 바로 타케츠루입니다. 타케츠루는 사케를 만들던 양조장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가문의 가업을 잇고자 양조에 관해 공부하던 중, 사케가 아닌 위스키에 빠져들면서 위스키 제조 회사에 취업합니다.
타케츠루의 열정과 노력을 알아본 위스키 회사의 사장은, 그에게 원하던 위스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라며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주고, 그는 그곳에서 위스키 증류소 견습으로 일하는 등 위스키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웁니다. 당시 그가 위스키를 공부하며 관련 지식을 빼곡히 적은 타케츠루 노트는 훗날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 증류소를 설립하는 밑바탕이 됩니다. 이 증류소가 세워진 것이 1923년이었고, 작년이 딱 일본 위스키 역사 100년이 된 해였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설립한 야마자키 증류소였지만, 이 증류소에서 처음 생산된 시로후다라는 위스키는 세간의 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흥행에 실패합니다. 스코틀랜드식 위스키에 치중해 만든 위스키가 일본인들 입맛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죠. 실패 이후 토리이는 대중적인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만드는 산토리, 타케츠루는 전통적인 위스키를 만드는 닛카를 창립했고, 이 두 회사는 현재 일본 위스키의 양대 산맥이 됩니다.
재패니즈 위스키의 정신: 장인정신
일본의 위스키를 스코틀랜드에 뒤지지 않는 위스키로 만들겠다는 집념, 위스키를 일본의 대표적인 술로 만들겠다는 집념. 두 사람의 이러한 집념을 우리는 흔히 장인 정신(일본 말로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은 장인 정신이 유명한 나라이듯 위스키에도 이러한 장인정신을 보여줍니다.
1. 미즈나라 캐스크
위스키의 맛을 좌우하는 큰 요인 중 하나가 위스키를 숙성하는 캐스크입니다. 캐스크 중에서도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캐스크가 있는데, 이를 미즈나라 캐스크라고 합니다. 이름처럼 미즈나라(みずなら)라고 불리는 일본산 참나무로 만들었는데, 이 참나무를 사용해 캐스크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캐스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다른 참나무들은 1~2년 정도 건조해도 되지만, 미즈나라의 경우에는 건조되는 데 최소 3년이 걸리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 모두 크게 소모된다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또, 나무 자체가 구멍이 많은 다공성 목재라 뒤틀림이 심해 캐스크를 만들어도 위스키 원액이 새어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왜 계속 미즈나라를 이용해 캐스크를 만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자국 위스키가 지닌 고유성을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미즈나라를 사용해 캐스크를 만들면, 침향 같은 특유의 향이 생기는데, 이러한 향이 일본 위스키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특징이 됩니다. 하다못해 이제는 위스키에 벚꽃 향이 나도록 벚나무를 활용해 캐스크를 만들기도 합니다.
2. 코르크를 사용하지 않는 병
위스키 병 입구에 코르크를 잘 사용하지 않는 것도 장인 정신의 한 예입니다. 위스키 원액이 조금이라도 코르크에 닿으면 위스키 맛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이를 허용하지 않는 자기들만의 규칙일 수 있겠습니다.
재패니즈 위스키의 세계적 평가
2022년 세계 3대 주류 품평회 중 하나인 ISC(International Sprit Challenge)에서 산토리 社의 싱글 몰트 증류소인 야마자키와 하쿠슈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위스키가 금메달 이상을 수상했고, 블랜디드 위스키인 히비키의 경우에는 3년 연속 금메달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재패니즈 위스키의 트렌드 변화
재패니즈 위스키의 침체기(1980~2010)
일본 위스키, 꾸준히 인기 있었던 걸까요? 일본에서 위스키의 인기는 지속해서 상승해 오다가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일본에 이자카야(술 종류와 간단한 요리를 제공하는 일본 음식점)가 줄줄이 생겨남과 동시에 줄어드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이자카야에서 위스키가 아닌, 일본 소주를 섞은 하이볼 츄하이(chu-hi)가 성행했기 때문입니다. 위스키로 만든 하이볼보다 훨씬 저렴하고 다양한 맛의 음료를 섞어 만들 수 있는 츄하이는 젊은 세대들에게 금세 인기를 끌었고, 반면 위스키는 자연스레 아재들의 술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졌습니다. 츄하이 탓에 2010년 초반까지 위스키 판매량은 80% 이상 줄어들 정도로 심각한 침체기를 맞이하죠.
재패니즈 위스키의 부활(2010~)
드라마 <맛상>
2010년 중반부터는 위스키가 부활합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2014년 9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일본 NHK에서 방영한 <맛상>이라는 드라마가 흥행한 덕분인데요. 이 드라마는 앞서 설명해 드렸던 타케츠루의 위스키 인생을 담아낸 150부작 드라마로, 당시 평균 시청률 20%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고 합니다.
드라마 방영 당시 위스키의 판매량은 전년 대비 약 20% 이상 상승했으며, 한 매체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드라마 방영 이후 10년 동안 일본 내에 위스키 증류소가 10배 이상 늘어나 현재는 100여 곳의 위스키 증류소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현재 스코틀랜드의 증류소가 150여 곳이니 증류소의 개수로만 따져보면 스코틀랜드의 명성을 일본 위스키가 거의 따라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류의 도움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본 내수시장에서 위스키 판매량이 증가한 데는 우리나라도 한몫했다는 겁니다. 2013년 신드롬을 일으킨 <별에서 온 그대>를 기억하시나요? 당시 드라마 속에서 도민준과 천송이가 치킨과 맥주를 함께 먹는 모습이 방영되자마자 치맥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 열풍을 탔습니다. 이를 지켜본 산토리 社에서는 자기들도 치맥 문화 같은 열풍을 한번 이끌어 보고자 하이볼과 가라아게(닭 튀김)를 합친 하이카라(ハイカラ)라는 단어를 만들어 마케팅을 시작합니다.
정리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일본 위스키는, 기본적으로 섬세하고 복잡한 맛이 특징입니다. 여기에 미즈나라 캐스크와 같이 독창적으로 생산되는 캐스크,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원액을 섞어 만든 블렌디드 원액을 추가로 숙성하는 새로운 블렌딩 기법 등이 더해져 더욱 풍부하고 심도 있는 맛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위스키는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침체기였다가 다시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열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오랜 침체기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신들의 길을 걸어온 일본의 장인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