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에 싱글몰트 증류소가 생기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위스키가 생산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 위스키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제대로 된 위스키를 생산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뿐입니다. 그런 한국 위스키에 대해 이번 글에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한국 위스키의 역사
1900년대 이전
위스키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항구를 개항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인데요. 당시에는 위스키라는 술의 명칭을 유사길(惟斯吉)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국민들에게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으니 위스키를 한자 음역으로 표기해 붙인 명칭이었던 것이죠. 의미는 따로 없고, 오직 발음을 위해 만든 단어라고 하니 무슨 의미인지 굳이 풀이해 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해져 오는 기록에 따르면 위스키 외에도 각종 수입 주류를 한자식 표기로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샴페인은 상백윤(上伯允), 보르도 와인은 복이탈(卜爾脫), 브랜디는 발란덕(撥蘭德)으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만약 비슷한 발음의 한자가 없으면 의미를 담은 경우도 있었으며 발음과 의미 모두 마땅하게 대체하기 어려워 아예 베르무트(향미 강화 포도주)를 월뭇이라는 한글로 표기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흥미로웠는지, 스코틀랜드 북부 스페이사이드에 있는 벤로막 증류소(benromach)에서 한국 헌정용 한정판 에디션 위스키를 내놓았는데, 이 제품의 이름을 유사길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기도 합니다.
1900년대 초반: 가짜 위스키의 시대
이 때의 위스키는 황실 연회에 자주 나올 만큼 상류층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 있던 술이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민들조차 위스키를 엄청나게 갈망했는데, 이는 위스키를 약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매체에서는 위스키는 소화를 증진하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자양 강장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감기에도 훌륭한 약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 내용을 접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위스키를 구해 마시려고 했겠죠?
다만 위스키 가격이 너무 비싼 탓에 쉽게 마시진 못했기에 1920년대부터는 아예 가짜 위스키를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위스키는 주정에 색과 향만 입힌 술이었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1921년 경성에서 제조된 위스키가 모두 1만 1206석*이었다고 하는데, 1석이 180리터이므로 약 200만 리터나 되는 양입니다. 현대 스코틀랜드의 증류소 한 곳이 1년간 생산하는 양과 비슷한 정도이니, 당시의 경제 사정을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양이네요. 이처럼 수요가 많으니 그만큼 가짜 위스키 사기행위도 많았다고 합니다.
*석(石) : 동아시아의 전통 도량형으로 곡식, 가루, 액체 따위의 부피를 셀 때 쓰는 단위.
가짜 위스키의 인기는 놀랍게도 해방 이후 많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는데요. 오죽하면 살인주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좀처럼 그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아 고래표, 빅토리, 스타, 뉴스타, 오림픽, 마도로스, 박커스, 럭키쎄분 같은 많은 가짜 위스키 브랜드들이 줄줄이 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술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노래 가사 속 등장하는 도라지 위스키라고 하는데요. 도라지 위스키에 얽힌 역사도 꽤 흥미롭습니다. 1956년 부산시 서구 토성동에 있는 한 양조장이 일본 위스키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산토리社의 토리스(Torys) 위스키 이름을 도용해 도리스 위스키라는 모조 위스키를 내놓는데요. 이 위스키는 흔히 말하는 ‘대박’이 났지만, 상표를 도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얼마 가지 못하고 사장이 구속됩니다. 이후 상표권을 피해 후속작으로 만들어진 위스키가 이 도라지 위스키입니다. 도라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스키죠.
1970년대 이전까지는 위스키의 밀수가 성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조니 워커(johnnie walker)가 밀수품으로 굉장히 인기 있었다고 해요. 그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원액을 20% 정도 첨가해서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만든 위스키는 베트남 전쟁 때 파병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자 활발히 제공됐다고 합니다.
1900년대 후반: 국가 주도의 진짜 위스키 생산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을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합니다. 우리는 이를 바덴바덴의 기적으로 부르지요. 한국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위스키 산업도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올림픽을 개최하면 당연히 많은 외국인이 방문할 텐데 그들에게 우리나라 전통주만 마시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며 모두가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는 술이 없다는 것이 개최 전 문젯거리로 떠오릅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가짜 위스키가 판을 치고 있어서 외국인들이 가짜 위스키를 마시거나 원액을 조금 탄 위스키를 마시게 될 일이 뻔하니, 정부는 국제적 망신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급하게 위스키 생산 정책 2가지를 세우는데요.
첫 번째 정책은 진로, OB, 베리 나인과 같은 대형 주류회사에 위스키 원액 100%를 넣은 제품을 생산토록 한 것입니다. 이 술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정책은 이 회사들에 국산 위스키 원액을 직접 만들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1987년 3월에 국내 위스키 원액을 첨가한 국산 위스키가 최초로 생산되었으나, 생산 단가가 너무 비싸 결국 국산 위스키 원액에 스카치위스키 원액과 주정을 섞어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그 이후
대차게 시작한 한국 위스키 사업,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허무하게도 1991년 주류 수입이 개방되면서 한국 위스키 사업은 뜨겁게 타올랐다가 금방 꺼집니다. 그 이후에는 임페리얼, 스카치 블루와 같이 스카치위스키 원액을 가져와 국내에서 병입해 생산하는 방식으로 한국 위스키를 생산하는데요. 하지만 이 위스키들은 중년의 술이라는 이미지로 인식되거나 유흥과 사치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한국위스키 사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호기롭게 보여준 성과를 미루어 봤을 때 우리나라도 충분히 위스키를 만들 수 있는 나라였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사실 1920년대만 보더라도 일본과 우리나라 모두 가짜 위스키를 만들고 있었기에 어느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일본은 세계 5대 위스키 강국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좋은 품질의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위스키 사업 분야에선 갈 길이 멉니다. 한국 위스키, 왜 기를 못 펴고 있는 걸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술에 붙는 세금인 주세를 알아야 하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다른 포스팅에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위스키
우리나라의 주세제도와 4계절이 있어 일정한 온도유지가 어렵다는 다양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 위스키를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요. 현재 한국 위스키 증류소는 총 세 곳인데 이 중 두 곳은 실제 제품화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한국 위스키 산업의 부흥을 기대하며 이 두 곳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쓰리소사이어티스
첫 번째 소개해 드릴 증류소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쓰리소사이어티스입니다. 재미 교포인 도정환 대표와 무려 44년 위스키 제조 경력을 갖고 있는 앤드류 샌드(Andrew Shand) 두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위스키를 만들고 있기에 세 나라의 문화가 합쳐졌다는 뜻에서 증류소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해요.
도정환 대표는 영국 CNN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社 등 세계 유명 언론과 IT기업을 재직했던 인물로, 처음엔 취미로 맥주 양조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증류소 창업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 글렌리벳, 일본의 닛카 위스키 증류소에서 증류소 생산을 기획, 설계, 감독하고 품질을 책임지는 마스터 디스틸러(master distiller)로 활동해 온 앤드류 샌드는 자신의 꿈과 도전 정신을 펼칠 마지막 무대로 한국을 선택했다고요.
쓰리소사이어티스의 강점은 언덕 꼭대기에 북향으로 숙성고를 지어 여름에는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스피릿(spirit)이 영하 6도까지 떨어지는 극과 극의 위스키 숙성 조건을 구축했다는 겁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3년 숙성한 위스키도 10년 이상 숙성한 위스키와 비슷한 숙성 속도를 보인다고 해요.
리소사이어티스의 대표적인 위스키는 2023년 첫 출시된 기원으로, 현재 배치 4(batch 4)까지 출시됐다고 합니다. 다양한 캐스크 숙성을 시도하고 있기에 배치마다 다른 맛을 내는 게 특징입니다. 숙성 연도도 점점 오래되고 있어 계속해서 좋은 품질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도정환 대표와 앤드류 샌드는 한국 위스키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복분자 캐스크, 일엽편주 캐스크 등 전통주 캐스크를 활용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국산 맥아, 효모, 오크통을 적극 활용하고, 심지어 보리농사까지 직접 짓는다고 하네요. 스코틀랜드로 치면 팜 디스틸러리(farm distillery) 같은 것이죠. 기원 위스키 외에 깻잎, 솔잎 등 한국적인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진(gin)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니 한국 위스키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창수 위스키
두 번째로 소개해 드릴 곳은 오픈런을 넘어 노숙런(?)을 해야만 구매할 수 있는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증류소를 운영하는 김창수 대표는 아마 한국 위스키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요. 현재 한국 최초의 마스터 디스틸러라는 칭호를 갖고 있기도 한 그는, 위스키 증류소를 세우고자 10년이 넘는 기간 노력해 오면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기에 많은 위스키 애호가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김창수의 삶이 이 증류소 역사 그 자체인 만큼, 그의 위스키 스토리를 한번 만나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김창수 대표는 전통주 명인인 김창수 명인의 이름이 자기 이름과 같다는 단순한 이유로 주류 제조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때부터 전통주 제조를 시작으로 술을 공부해 왔다고 하네요. 그러다 우연히 라프로익 10년이라는 위스키를 맛보고는 위스키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데요.
그는 우리나라에서 위스키를 아무도 만들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들어 보겠다는 열정 하나로 2013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바텐더와 주류 수입사 직원으로 현장 경험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듬해인 2014년에는 위스키를 제대로 공부하고자 전 재산이던 1000만 원을 들고 무작정 스코틀랜드로 향하죠. 그는 장장 4개월간 스코틀랜드에서 오로지 자전거 하나에 짐과 몸을 맡기며 여행했고, 잠은 텐트에서 자며 증류소 102곳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하는데요. 의지가 정말 대단하죠?
모든 증류소 투어를 마치고 글래스고의 위스키 바에 갔는데, 이 바에서 우연히 일본의 치치부증류소 직원을 만나고 치치부 증류소 위스키 제조공정 연수를 받게 됩니다. 이런 김창수의 일화를 일본 NHK에서 방송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일본에서 김창수를 보고는 일본 위스키 역사적 인물인 다케츠루를 빗대어 한국의 맛상(マッサン, 다케츠루의 애칭)이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제성에 비해 한국에 돌아와 위스키 증류소를 세우는 데 큰돈이 필요했던 김창수에게 아무도 투자하지 않았다는데요. “대기업도 못하는 일을 30대 청년이 무슨 수로 하겠다는 거야?” 하면서 그의 능력을 의심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그는 2016년부터 다시 주류 회사에 들어가 일하고, 2018년에는 바를 열어 바텐더로 일합니다. 낮에는 투잡까지 뛰며 하루에 20시간씩 일을 해 돈을 모았다고 하네요.
이렇게 모은 돈으로 2020년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작은 창고를 빌려 증류소로 개조한 것이 지금의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의 시작이 됐다고요. 이렇게 탄생한 증류소는 불과 90평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규모인데요. 부지가 작으니 증류기 규모도 1차 증류기는 500리터, 2차 증류기는 300리터로 작습니다. 1년에 300병 정도만 생산하고 있으니, 노숙런을 해야만 구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워낙 규모가 작기 때문에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동화 공정들을 사용할 수 없는 대신, 다양한 시도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리에 싹을 틔운 몰트(malt)를 엿기름이라고 하는데, 식혜를 만들 때 사용하는 이 엿기름으로 위스키를 만든다거나, 소규모 증류소라는 점을 활용해 다양한 재료의 당화조를 사용해 보는 등의 새로운 실험을 해 보면서 위스키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증류기가 작아서 구리와 만나는 면적이 커 잡냄새를 없애는 데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맛과 향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단점을 극복하고자 규모 맞춤형 설비를 특수 제작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산한 위스키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김창수 위스키라는 제품으로 출시하고 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노숙런까지는 아니더라도 오픈런 정도는 시도해 보셔서 한번 마셔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정리
생각보다 오랜 위스키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여러 장벽으로 인해 제대로 된 위스키가 나오지 않고 있던 한국 위스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최근 세 증류소가 설립되어 생산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대기업이 설립할 예정인 새로운 증류소들을 시작으로 한국 위스키 시장을 포함한 고급 주류산업이 더욱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는 것입니다.